애초에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원작 소설 '바람의 화원' 때문이었다. 사실 소설도 그다지 문체가 매끄럽거나 묘사가 뛰어났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워낙 소재 자체가 신선했고,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아이디어 역시 좋았다. 덕분에 두권 짜리 소설이지만 금새 책장이 넘어갔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한동안 그 여운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다니! 무엇보다 최초로 '예술'을 중심에 둔 사극이란 점에서 난 분명 이 드라마가 다모, 한성별곡을 뛰어넘어 '사극'이란 장르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는 작품이 될거라 기대했었다. 

사실 초반에는 기대했던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면서도, 매회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추가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지고, 원작을 벗어나 드라마만의 느낌을 구축하는가 싶었다.




특히나 '신윤복' 캐릭터는 드라마만의 색깔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캐릭터였다. 소설 속 윤복이 시니컬하고 냉정한 느낌이었다면, 드라마 속 윤복은 인간적이고 따뜻한 느낌이다. 이와 더불어 조금씩 드러나는 천재성과 어떤 슬픔을 간직한듯한 그의 아우라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이 종국에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괴롭게 만들고, 혼자서는 어떤일도 해결할 수 없는 나약한 캐릭터로 그를 변질 시킬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럴거라면 차라리 소설 속 시크한 윤복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갔어야 했다.




또한 김홍도는 어떤가. 이 작품의 제목 '바람의 화원'은 분명 '신윤복'을 지칭하는 것으로 마땅히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야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중반 이후로 '김홍도'에게 너무 집착(?)하는 바람에 결국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만들어 버린다. 게다가 신윤복을 구한답시고 불구덩이에 손을 집어넣고 집단 구타를 당하는 등의 차력쇼를 선보이는가 하면, 신윤복의 모든 일들을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양, 자신이 아니라면 신윤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듯이 모든일에 간섭하며 나선다. 심지어 마지막회에서는 정향의 앞일까지 미리 준비해놓는 치밀함(?)을 보이기까지. 이쯤에서 드는 의문. 홍도는 윤복이 여자인걸 알았음에도, 왜 윤복과 정향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걸까? 뭐, 이 드라마에 대충대충 넘어가는 설정이 한두개냐만은.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는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벌려놓고 제대로 수습을 하지도 못한 채 어설픈 결말을 맺고 있다. 그건 바로 정향과 윤복의 관계다. 정향은 분명 윤복이 여인인걸 모르고 그를 마음에 담게 되는데, 그렇다면 윤복은 어떠한 감정으로 정향에게 다가간걸까. 게다가 윤복은 어떻게 그리도 한순간에 정향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었으며, 왜 그렇게 갑작스레 홍도에게 마음을 주게 된 걸까. 만약 정향과 윤복의 관계가 결국은 '동성애' 이기 때문에 제작진이 몸을 사린거라면, 애초에 이들의 관계를 그렇게 발전 시킬것이 아니라 여운을 남기는 정도로 끝냈어야 했다. 게다가 정향은 윤복이 여인인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에게 매달리는데, 윤복은 자신이 이제 여인인걸 고백했으니 다 됐다는 식으로 홍도에게 마음을 줘버리기 까지. 생각해보면 동성커플이나 아빠 친구-친구 딸의 관계나 공중파에서 다루기엔 위험한 관계 아닌가? 무엇보다 갑작스런 윤복-홍도의 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이젠 친구 딸이 아니느니 맞느니 하며 홍도를 통해 끊임없이 나열되던 구질구질한 변명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사실 문근영과 박신양을 커플로 본다는것 자체가 비주얼적으로도 큰 무리였지. 이건 당최 개연성도 없고, 일관성도 없고.

주요 캐릭터들 마져 이모양으로 된 마당에 원작에서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악역 캐릭터 김조년과 기타 여러 캐릭터들이 드라마에서 모조리 우스워진 것은 더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다.

캐릭터들이 이렇듯 망가졌으니 이 드라마의 본질인 '그림'에 대한 접근이 제대로 됐을리도 만무하다. 초반에는 그림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면서 감탄을 자아내더니, 중반에서 후반부엔 그냥 대충 끼어맞추기에 급급한 수준. 특히 '바람의 화원' 이란 드라마의 발단이 된 신윤복의 '미인도'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 그림이 가지고 있는 무게에 비해 너무나 가볍고 어설프게 표현되었다. 결론적으로 어떤면으로 보든간에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이다.



그나마 내가 이 드라마를 통해 얻은 수확은 '문근영' 이란 배우의 발견이다. 그동안 그녀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그냥 인기있는 어린 배우라고만 생각하고 신윤복 역할에도 어울리지 않을거라 예상했는데, 1회를 보자마자 굉장히 놀랐다. 목소리며 행동이며 눈빛이며 모두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기면서 역할에 완전히 몰입된 모습이었기 때문. 특히 중반 이후 드라마가 길을 잃고 산으로 가고 있을때도 그녀의 연기 만큼은 흠 잡을곳 없을 만큼 완벽 했다. 때문에 드라마가 그녀의 연기에 기대어 대충 묻어가는 느낌마져 들 정도. 이런 드라마에 그녀의 연기가 소모 된다는게 참 아깝다. 

여러가지로 이번 작품이 좀 충격이었겠지만, 훌훌 털어버리고 더 좋은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우선 '장화,홍련'부터 다시 봐야겠음.


덧. 여담으로 난 문근영이 일본드라마 '백야행'의 여자주인공 '유키호' 역할을 하면 굉장히 잘어울릴것 같다. 아님 그녀의 나이에 맞게 영화 '무지개 여신'에서 우에노 쥬리가 맡았던 역할도 잘 어울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