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퇴근길은 기분 나쁘다. 하루종일 질퍽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비오는 출근길 보다는 좀 덜 하지만, 퇴근길에 내리는 비 역시 마음을 눅눅하게 만들어 버리기는 마찬가지다. 덕분에 오늘 퇴근후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들을 다 취소하고 곧바로 집으로 와버렸다.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던 오분 남짓한 시간동안 나는 충분히 흠뻑 젖어버렸다. 이미 발목까지 흥건해 진 후, 청바지를 따라 점점 위로 올라오는 습하고 축축한 기운은 직장인인 나에게 하루 중 가장 즐거웠어야 할 퇴근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사이에 자꾸만 내 머릿속에서는 어제 봤던 영화 '무지개 여신'의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그들의 첫 만남. 그들이 친해지는 계기가 된 지폐 반지를 건네는 장면. 영화 속에서 영화를 찍으며 무드없이 진행됐던 첫 키스.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과 행동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그의 모습.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 모든걸 포기하고 그럴 수 있다며 고백아닌 고백을 해버리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한참 후에야 그에게 들켜버린 그녀의 마음.
우유부단한 점도 좋아
근성없는 점도 좋아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점도 좋아
둔감한 점이 좋아
웃는 얼굴이 가장 좋아
마침 이어폰을 통해 흐르던 음악 때문인지 나는 마치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환각에 빠져버렸고, 음악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핑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정말 여러가지로 술이 생각나는 날이다.
사실은 이미 한잔 한 상태지만, 이 정도론 부족하다. 이렇게도 비가 쏟아지는 날이니.
내일은 그치려나. 비가 그치면 혹시 무지개가 떴는지 하늘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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