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소재도 김기덕 감독이 만들면 이렇게 다르다는걸 보여 준 영화. 처음 '숨'이란 영화 이야기를 들었을때 소재의 비슷함으로 인해 자연스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렸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두 영화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지향하는 관점 자체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런 단순한 플롯에 이런 메타포를 넣어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낸 것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야기의 구도는 사형수 '장진'과 주부 '주연'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내와 두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진은 감옥에서 자살시도를 하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리고 우연히 그 뉴스를 본 주연은 다른 여자와 바람 난 남편과 싸우다가 집을 나와서는 무작정 장진을 면회하러 교도소로 향한다.
영화속에선 장진이 왜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주연이 왜 그를 찾아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서로를 통한 스스로의 소통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기에 남편 앞에서는 말 한마디 안하던 주연이 장진 앞에선 자신의 상처를 하나씩 토해내며 마치 자신이 알고있고 갖고있는 모든걸 그에게 보여주려 하고, 그동안 장진이 자살 시도를 통해 생긴 목의 상처가 점점 아물어가는 것 처럼 그의 마음이 조금씩 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숨'은 김기덕 감독의 전작 '빈집'과 많이 닮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중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그렇지만, '숨' 역시 일상이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뭔가 비정상적이고,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진이나 주연의 캐릭터만 봐서는 거의 '김기덕식 판타지'라고 불러도 될만한 상황.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환상을 깨는 장치가 '보안과장' 이란 캐릭터다. 주연이 처음 장진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온 순간부터 면회를 하는 순간마다 교도소의 '보안과장'이 감시 카메라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이 등장하기 때문. 놀라운건 감시 카메라 모니터에 조금씩 비치는 보안과장의 모습이다. 처음엔 단순히 관음증을 가진 캐릭터라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생각해보니 이런 장치를 통해 이 영화가 지닐 수 있는 비현실성을 경계한것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는건 '보안과장'역할을 김기덕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는 것.
대사 한마디 없이 눈빛과 표정만으로 모든걸 이야기 해낸 '장첸'도, 소름끼치도록 날이 선 연기를 보여준 '지아' 라는 배우도, '시간'에 이어 두번째로 김기덕 감독 작품에서 만나는 '하정우'도 영화 속 캐릭터들에 참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마치 초현실주의 작가의 그림을 보는 것 처럼, 잠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숨막히는 경험을 해보고 싶은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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